Torvald's Tech Tales

인간 슬롭: 인문학 에디션™

2026-04-01 00:11 Share This Article English · 한국어

이전 글에서는 공식을 따라 만든 AI 담론 글에 관해 다루었습니다. 클릭 유도로 시작해서 기깔나는 마무리로 끝나는, 너무나도 뻔해서 기계가 4초만에 만들어낼 글이었죠. 우리는 이걸 ‘인간 슬롭’으로 불렀습니다. 인간이 작성하기는 했지만, 템플릿을 너무 잘 따라서 누가 썼는지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컨텐츠였죠.

저번에 다룬 건 ‘정보 슬롭’이었습니다. 이번엔 ‘지식 슬롭’을 다룹니다.

1. 이미 많이 읽어봤을 책

협력한다는 착각

우리가 함께 만들고, 함께 부순 세계에 관하여

1장: 이스터섬에서 온 이야기

1722년, 네덜란드의 항해사 야코프 로게벤이 유럽인 최초로 이스터섬에 발을 디뎠을 때, 그는 이후 수백 년간 서양 과학계를 괴롭히게 될 수수께끼와 마주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섬 곳곳에 거대한 석상 약 900기가 흩어져 있었다. 모아이. 무게가 80톤이 넘는 것도 있었고, 하나같이 해안에서 섬 안쪽을 향해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섬의 주민은 고작 수천 명. 로게벤의 표현을 빌리면 “비참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목재도, 금속 도구도 없었고, 자기 머리 위로 우뚝 솟은 거석을 조각하고 운반하고 세웠을 수단이라곤 눈에 보이지 않았다.

수수께끼 자체는 단순해 보였다. 대체 어떻게 만들었을까? 그러나 더 깊은 질문이 있다. 이 책이 진짜로 다루려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왜 멈추었을까?

수십 년간 지배적이었던 이론은 생태적 자살이었다. 이야기의 골자는 이렇다. 주민들이 모아이를 운반할 통나무 굴림대를 만들겠다고 나무를 마지막 한 그루까지 베어냈고, 경쟁적 기념물 건설의 광풍 속에서 스스로의 생태계를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를 위한 우화로 더할 나위 없었다. 자원을 소진하여 스스로를 삼킨 문명.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2005년 저서 《문명의 붕괴》에서 이 이야기를 핵심 사례로 삼았고, 이스터섬은 자원 고갈에 대한 경고담으로 대중의 의식에 자리 잡았다.

그런데 최근의 고고학이 이 그림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뒤집어놓았다. 화분 분석에 따르면, 산림 파괴는 모아이 시대보다 수백 년 앞서 시작됐다. 원인은 폴리네시아 쥐였다. 야자 씨앗을 먹어치운 것이다. 주민들이 기념비적 허영에 사로잡혀 숲을 밀어버린 것이 아니라, 석상 건설이 시작되었을 때 숲은 이미 쇠퇴하고 있었다. 모아이 자체도 경쟁적 과잉의 상징이 아니라 오히려 협력의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영토를 표시하고, 사회적 합의를 성문화하고, 경쟁하는 씨족들 사이에서 부족한 자원의 분배를 관리하는 역할이었다.

다시 말해 석상은 문제가 아니었다. 해법이었다. 이스터섬이 붕괴한 것은 — 실제로 붕괴했는지 자체가 논쟁 중이지만 — 사람들의 협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수백 년간 작동해온 협력의 구조가 외부 조건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협력하려는 본능과 협력 구조의 취약성, 이 둘 사이의 구별이 이 책의 주제다.

2장: 포틀래치 문제

1921년 겨울, 콰콰카와쿠 족의 추장 댄 크랜머는 브리티시컬럼비아 해안의 빌리지 아일랜드에서 기록에 남은 가장 큰 규모의 포틀래치를 열었다. 며칠에 걸쳐 그는 당구대, 재봉틀, 카누, 허드슨베이 담요 수백 장을 나누어주었고, 일부 기록에 따르면 모터보트 몇 척까지 내놓았다. 캐나다 법률상 이 의식은 불법이었다. 당국은 참가자 45명을 체포했다.

식민 행정부의 눈에 포틀래치는 비합리적이었다. 참가자를 가난하게 만드는 기이한 경쟁적 선물 교환 의례. 그러나 콰콰카와쿠 족에게 그것은 경제 그 자체였다. 부를 재분배하고, 부채를 청산하고, 서열을 확립하고, 사회적 기억을 부호화하는 체계. 담요는 낭비된 것이 아니었다. 데이터였다.

포틀래치가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이유는 이국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익숙하기 때문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포틀래치의 논리는 존재했던 거의 모든 인간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다. 우리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의 대박을 위해 실패할 스타트업 열두 곳에 투자하는 벤처 캐피탈리스트는 경쟁적 재분배의 한 형태에 참여하고 있다. 접근 비용을 받지 않고 논문을 자유롭게 공개하며 명성을 쌓는 학자는 빌리지 아일랜드에서 크랜머가 운용했던 것과 구조적으로 동일한 위신 경제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포틀래치의 논리는 불확실성 하의 협력의 논리다. 자원을 넓게 분배하고, 손실을 감수하며, 네트워크가 시간이 지나면 가치를 돌려줄 것이라고 신뢰하는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가 그것을 더 이상 그렇게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3장: 축의 시대와 규모의 문제

기원전 800년에서 200년 사이, 여러 문명에서 동시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리스, 중국, 인도, 페르시아, 레반트. 서로 접촉이 거의 혹은 전혀 없었던 사회들에서 새로운 종류의 사유가 출현했다. 철학자와 종교 지도자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보편적 윤리 원칙을 명시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교의 상호성, 불교의 자비, 그리스의 합리주의, 조로아스터교의 도덕적 이원론, 히브리의 유일신적 정의.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이를 축의 시대라 불렀고, 그 이후 이 개념은 거대 역사 서사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통상적인 설명은 관념적이다. 인류의 사유가 성숙한 것이라고. 그러나 더 구조적인 독해가 가능하다. 이 사회들은 하나같이 도시화, 교역, 정복을 통해 어떤 규모의 문턱을 막 넘어선 상태였고, 그로 인해 오래된 혈연 기반의 협력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두가 모두를 아는 마을에서는 증여 경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낯선 사람 5만 명이 모인 도시에서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읽으면, 축의 시대는 지혜의 자발적 개화가 아니었다. 긴급 펌웨어 업데이트였다. 부족 단위 협력의 한계를 넘어선 사회가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필요로 했다. 보편적 원칙, 성문법, 비인격적 제도. 대규모 조율을 위한 것들이었다. 살아남은 철학은 규모의 문제를 해결한 철학이었다.

이러한 재구성은 현재를 이해하는 방식을 바꾼다. 우리 시대가 직면한 도전은 섬뜩할 정도로 유사하다. 20세기를 지탱했던 협력 구조들, 즉 국민국가, 국제 조약, 직업 길드, 공유된 미디어 환경은 세계화와 디지털 통신,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구조들이 촉진하려 했던 바로 그 상호연결성의 무게 아래 휘청거리고 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제도의 규모를 넘어섰다. 그리고 축의 시대의 사회들과 꼭 마찬가지로, 새로운 제도를 허겁지겁 모색하고 있다.

4장: 신뢰 분자와 교역소

2004년, 신경경제학자 폴 잭은 그를 잠시 유명하게 만들어줄 실험을 수행했다. 피험자들에게 신뢰 게임을 시켰다. 한 플레이어가 상대에게 돈을 보내면, 그 돈이 세 배로 불어나고, 받은 쪽이 얼마를 돌려줄지 결정하는 게임이었다. 잭은 이 과정에서 피험자들의 옥시토신 수치를 측정했다. 결과는 인상적이었다. 신뢰의 표시를 받으면 옥시토신이 급증했고, 그 급증이 수신자를 더 관대하게 만들었다. 잭은 옥시토신을 “도덕 분자”라 명명했고, TED 강연을 돌며 생물학이 우리를 협력에 맞게 배선해두었다고 주장했다.

매혹적인 이야기다. 동시에 상당히 과장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후속 재현 연구의 결과는 엇갈렸다. 옥시토신의 효과는 맥락에 강하게 의존하며, 내·외집단 역학, 기존 관계, 문화적 프레이밍에 따라 조절된다. “도덕 분자” 서사는 자체의 단순함에 짓눌려 무너졌다. 이 패턴은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다.

그러나 잭이 던진 근본적 질문은 옳았다. 협력이 그토록 취약하다면, 신뢰의 모든 행위가 상대가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도박이라면, 인류는 어떻게 대륙을 가로지르는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었을까? 경제사와 인류학에서 공히 도출되는 답은 이렇다. 느리게, 그리고 많은 인프라를 갖추어.

폰다코를 생각해보자. 유럽과 아랍 상인들이 상대측 항구 도시에 유지했던 중세의 교역소다. 이것은 단순한 상업 건물이 아니었다. 신뢰의 건축이었다. 공유된 법률이 없는 상황에서 평판을 확인하고, 분쟁을 중재하고, 계약을 집행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 폰다코는 오늘날 블록체인 옹호자들이 해결했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문제, 낯선 이들 사이의 무신뢰 협력을 해결했다. 단, 암호학적 증명이 아니라 사회공학을 통해서.

한자동맹에서 현대 대학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모든 인간 제도는 위장한 폰다코다. 신뢰의 비용을 낮춤으로써 협력을 저렴하게 만드는 구조.

5장: 협력의 덫

앞선 장들이 협력을 인류의 위대한 재능으로 그렸다면, 이 장은 그 그림자를 그려야 한다. 대성당과 교역 네트워크를 세우는 바로 그 본능이 카르텔, 민족국가, 무장 동맹도 세우기 때문이다. 협력은 본질적으로 선하지 않다. 도구다. 모든 도구가 그렇듯, 그것을 쥔 자의 목적에 봉사한다.

마피아는 근대사에서 가장 효과적인 협력 제도 중 하나다. 다국적 카르텔도 마찬가지다. 이 맥락에서 말하자면, 대서양 노예무역도 그랬다. 유럽 상인, 아프리카 중개인, 플랜테이션 소유주, 금융 기관이 수세기에 걸쳐 대양을 가로지르며 유지한 경악할 만큼 복잡한 협력의 네트워크. 그것을 가능하게 한 협력 구조는, 순전히 구조적인 의미에서, 한자동맹이 만들어낸 어떤 것 못지않게 정교했다.

이것이 협력의 덫이다. 협력 체계를 강력하게 만드는 바로 그 요소들, 즉 공유된 정체성, 상호 의무, 신뢰 집행, 집단 행동이 안으로 향할 때 그것을 위험하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모든 내집단은 외집단을 함축한다. 모든 신뢰 네트워크에는 경계가 있으며, 경계 바깥에 있는 이들에 대한 처우는 내부에서 유지되는 신뢰에 반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다. 훈훈한 사례에서 멈추는 인간 협력론은 학문이 아니라 광고다.

6장: 더 나은 폰다코를 짓기 위하여

그래서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인간은 강박적으로, 기발하게, 그리고 종종 파괴적으로 협력하는 종이다. 마을 단위의 호혜에서 국제법에 이르는 우리의 협력 구조들은 강력하지만 취약하고, 효과적이지만 도덕적으로 중립이며, 그것이 해결해야 할 문제의 규모에 언제나 뒤처진다. 이스터섬 사람들에게 협력의 본능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다. 생태가 발밑에서 바뀌었을 때 거기에 적응할 수 있는 구조가 부족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도 같다.

그러나 축의 시대는 반론을, 그리고 아마도 조심스러운 낙관의 근거를 제공한다. 기존 협력 구조가 규모 앞에서 실패했을 때, 인간 사회는 간혹 새로운 것을 발명해낸 적이 있다.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느리고 지저분한 제도 수준의 실험을 통해서. 우리 시대의 과제는 공자와 솔론이 직면했던 과제와 같다. 낯선 이들 사이에서, 대규모로, 극단적 불확실성의 조건 하에서 작동하는 신뢰의 건축을 짓는 것이다.

우리는 전에 해낸 적이 있다. 다시 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협력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는 것, 훈훈한 버전이 아니라 카르텔과 대성당을 모두 포함한 전체 그림을 이해하는 것이 그 작업의 출발점이다.

2. 템플릿

본 적 있는 책일 겁니다.

정확이 이 책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협력한다는 착각》은 실존하는 책이 아닙니다. AI가 90초만에 지어낸 것이죠. 하지만 비슷한 건 봤을 겁니다. 서점의 인문학 코너에서 집어왔을 겁니다. 강연도 봤을 겁니다. 명절에 친척이 약간 엇나간 결론과 함께 이야기도 했을 겁니다. 그리고 아무도 틀린 줄을 몰랐겠죠. 왜냐하면 이런 책은 약간 엇나간 결론과 함께 이야기가 되도록 설계됐기 때문이죠.

구조는 항상 똑같습니다.

1. 커다랗고 도발적인 질문
   “왜 문명 발전은 불균형적일까?”
2. 놀라운 관찰
   폴리네시아의 낚시꾼 / 듣도보도 못한 부족 / 카지노 실험 등
3. 아주 과감하고 보편적인 주장
   “모든 것은 사실 모모 때문이다.”
4. 느슨히 연결된 사례집
5. 만족스러운 거대이론
6. 희망적 혹은 철학적 마무리
   “모모를 이해하면 우리 사회는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협력한다는 착각》은 이 템플릿을 바탕으로 생성됐습니다. 이스터 섬은 ‘놀라운 관찰’에 해당합니다. 포틀래치는 ‘이건몰랐지’ 사례 연구입니다. 축의 시대는 지적 무게감을 더합니다. 옥시토신은 과학맛을 추가합니다. 5장은 어두운 면을 아무튼 다루긴 했다고 말할 수 있게 끼어들었습니다. 그리고 6장은 이 장르 필수요소인 조심스러운 낙관론으로 낙관을 찍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엉망인 이유를 설명하는 책은 우리가 되돌릴 수 있다는 내용으로 끝나야지, 안 그러면 안 팔리거든요.

‘협력’을 ‘지리’로 바꾸면 《총·균·쇠》가 됩니다. ‘인지 편향’으로 바꾸면 행동경제학 서가의 절반이 됩니다. ‘네트워크’로 바꾸면 나머지 절반이 됩니다. 이 공식은 너무도 안정적이어서 거의 장르를 형성할 수준입니다. 그리고 모든 장르가 그렇듯 너무 흔해서 거의 보이지도 않을 수준이 된 필수요소가 있죠.

3. 압축 파이프라인

진짜 문제는 이런 책이 존재한다는 점이 아닙니다. 이런 책이 어떻게 만들어지느냐죠.

모든 교양서의 밑바닥에는 진짜배기 학문이 있습니다. 수백만 장의 인류학적 현장 연구, 경제 모델링, 고고학적 분석, 그리고 동료평가를 통과한 논쟁이 있죠. 이 학문은 방대하고, 전문적이고, 학자간의 논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물론 학문은 그래야만 합니다. 그래야 지식이 발전하는 법이니까요. 이스터 섬의 산림 벌채에 관한 논문은 30쪽을 꽃가루 분석법에 할애하고 나서야 간신히 전제조건 6개로 쿠션을 깐 부분적 결론에 이릅니다.

이런 책은 아무도 안 사갑니다.

따라서 학문은 압축됩니다. 먼저 기자들이 새로운 발견에서 전제조건을 싹 걷어내죠. 그 다음은 교양서 작가들이 가장 만족스러운 내러티브가 나오는 결과를 여러 분야에서 골라오고 하나의 주장으로 엮습니다. 그 다음은 강연회 강연자들이 이 책을 18분짜리 스피치에 자기 생각을 더하고 기깔나는 마무리로 요약합니다. 그 다음은 SNS죠. 이 모든 걸 문장 하나, 혹은 카드뉴스로 줄여버립니다.

인류학 (수백만 장의 진짜배기 결론들)
        ↓
저널리즘 (요약본)
        ↓
교양서 (슬롭 추가)
        ↓
강연회 (슬롭 많이 추가)
        ↓
SNS 게시글 (완전한 신호 손실)

각 층은 뉘앙스를 제거하고 접근성을 높힙니다. 그리고 각 층은 증거가 지지하는 수준을 넘는 확신을 덧바릅니다. 왜냐하면 전문성 같은 건 압축이 잘 안 되거든요. “이러한 증거는 이런저런 조건하에서 모모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에 대한 또다른 해석이 존재하는데, 이는 몇 장에서 다룰 것이다”라고 말하는 논문은 “모모가 모든 것의 열쇠다”라고 말하는 책으로 변신하고, 이는 “사실 다 모모때문이예요”라고 말하는 강연회가 되며, 이는 다시 “인생은 모모다”라는 인터넷 글이 됩니다.

이는 새로운 관찰이 아닙니다. 학자들은 이러한 대중화를 수 세기간 불평해왔습니다. 이제 와서 이를 다시 볼 필요가 큰 것은, 지금 시대는 AI의 발전이 이 파이프라인 구조를 무시하는 걸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협력한다는 착각》은 언어모델에 의해 90초만에 생성됐습니다. 그럼에도 아주 그럴싸한 교양서가 나왔습니다. 이 장르의 구조는 너무나도 뻔해서 단순한 패턴매칭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죠. 이 틀 자체가 작품입니다.

AI가 지적 압축을 발명한 게 아닙니다. 출판업계가 발명했죠. 모델은 그저 똑같은 파이프라인을 더 빠르게 돌릴 뿐입니다.

4. 지적 정크 푸드

처음 글에서는 공식을 따라 만든 AI 담론 글이 정보적 정크 푸드라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이해 없이 허기를 채워주는 것들이었죠. 교양서 슬롭은 지적 정크 푸드입니다. “왜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지?”라는, 다른 종류의 허기를 채워주죠. 그리고 똑같은 방식으로 채워줍니다. 실제 학문 앞에선 순식간에 녹아버리지만 아무튼 통찰이 생겼다는 느낌으로 말이죠.

이것은 교양서들이 잘못되었다는 것과는 다른 내용입니다. 대부분은 진짜 논문을 인용하고 참으로 흥미로운 내용을 담습니다. 《총·균·쇠》는 수십 년의 생물지리학 연구 위에서 쓰였습니다. 《생각에 관한 생각》은 노벨상을 수상한 연구 프로그램을 탄생시켰습니다. 이 두 책은 탄탄한 학문이 이들을 떠받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장르가 학문을 대중을 위해 포장하는 과정에서 무슨 짓을 하느냐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증거의 강도보다 내러티브의 일관성을 기준으로 선별합니다. 사례 연구가 포함되는 이유는 가장 대표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놀랍기 때문입니다. 이스터 섬이 교양서마다 등장하는 이유는 생태 붕괴의 최적 사례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많은 학자들은 애초에 생태 붕괴가 아니라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황량한 섬 위에 우뚝 선 거대한 사람 머리 모양 돌덩어리들은 첫 장의 소재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소재이죠.

둘째, 거대이론을 주창합니다. 학계는 부분적이고 서로 경쟁하는 설명들과 편하게 공존합니다. 교양서는 그럴 수가 없죠. 이 장르는 모든 것을 설명하는 단 하나의 뭔가를 요구합니다. 《불균형적 발전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상당한 예외가 동반된 부분적으로 겹치는 여러 요인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책은 안 팔리거든요. 과감하고 보편적인 주장은 지적 결론이 아닙니다. 이는 마케팅 요건입니다.

셋째, 논쟁을 평평하게 밀어버립니다. 진지한 학문 분야에는 활발한 논쟁, 미해결 질문, 그리고 주류 내러티브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교양서 템플릿은 이를 한 문단에서 인정하고 넘어가는 것으로 처리합니다. 독자에게 반론이 존재하지만 검토해보니 별 것 아니었다는 인상을 남기죠. 《협력한다는 착각》의 5장(협력에도 어두운 면은 있다)은 구조적 양보이지, 진정한 논의가 아닙니다. 반론을 아무튼 다루긴 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존재할 뿐입니다.

결과물은 주어진 주제를 깊게 이해한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물건입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왜 문명이 불균형적으로 발전했는지, 왜 사람들이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지, 네트워크가 어떻게 역사를 형성하는지 알게 된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실제로 남은 건 내러티브입니다. 그럴싸하게 잘 짜여 있고, 저자가 읽은 50편의 논문을 똑같이 읽지 않고서는 팩트체크가 거의 불가능한 내러티브 말이죠. ‘이해한 느낌’과 ‘이해한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장르는 그 구별을 흐리도록 설계되어 있죠.

이런 책들은 세상을 설명해준다고 약속합니다. 진짜 학문은 대개 세상이 왜 생각보다 설명하기 어려운지를 설명해주죠.

5. 포장의 문제

여기서 익숙한 종류의 경멸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이공계의 인문학 비하, 인문학은 본질적으로 허접하다는 뉘앙스, 교양서를 읽는 사람은 호구라는 암시 말이죠.

정확히 잘못된 결론입니다.

문제는 인문학이 아닙니다. 인류학, 역사학, 경제학, 인지과학은 진짜 지식을 만들어내는 진지한 학문입니다. 문제는 학계와 대중 독자 사이에 있는 포장 계층입니다. 출판 공식, 강연회 관행, 과감한 주장에는 상을 주고 신중한 전제조건에는 벌을 주는 SNS 인센티브 구조 말이지요. 꽃가루 분석에 수 년을 보내는 학자들은 진짜배기 일을 합니다. 그 결과를 ‘이스터 섬 이야기’라는 챕터로 바꿔버리는 시스템은 아예 다른 일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자기 할 일을 놀라울 정도로 잘 합니다. 교양서 템플릿이 상업적으로 통하는 이유는 인간의 진짜 인지적 욕구에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진심으로 세상이 왜 이런지 이해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내러티브로 사고합니다. 복잡한 현상이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될 때 진심으로 만족감을 느낍니다. 이 템플릿이 성공하는 건 사람들을 속여서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원하는 형태로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독자가 놓치고 있는 줄도 몰랐던 뉘앙스를 대가로 치르면서요.

이것은 구조적으로 공식을 따르는 AI 담론에 관해 말한 것과 같은 주장입니다. 그러한 글이 살아남는 이유는 독자가 멍청해서가 아닙니다. 진짜 불확실성의 불쾌함 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분야를 이해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죠. 교양서 슬롭은 같은 일을 더 큰 규모와 더 긴 시간에 걸쳐 합니다. 포장이 더 좋을 뿐, 메커니즘은 동일합니다.

6.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첫 글에서와 마찬가지로, 해독제는 구체성입니다. 그리고 지저분함에 대한 내성이죠.

이스터 섬 논쟁에 진지하게 임하는 책은 영화 같은 일화로 시작해서 거대이론으로 전환하지 않습니다. 논쟁으로 시작합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이렇게 주장했고, 테리 헌트와 칼 리포는 이런 걸 발견했고, 꽃가루 기록은 이걸 시사하고, 아직 모르는 건 이겁니다. 이러한 책은 증거가 뒷받침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말해줍니다. 불확실성을 매끈하게 지워버리는 대신 읽을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이런 책은 존재합니다. 훌륭한 대중 학술서 중 상당수가 정확히 이렇습니다. 하지만 베스트셀러 목록을 지배하지는 않죠. 불확실성은 비밀 폭로보다 팔기 어렵거든요.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은 교양서를 그만 읽을 것이냐가 아닙니다. 통찰의 느낌을 탐구의 끝으로 볼 것이냐, 시작으로 볼 것이냐입니다. 교양서는 아무리 잘 쳐줘도 색인입니다. 원한다면 진짜 학문으로 다가갈 수 있는 나침반이죠. 최악의 경우는 그 학문을 완전히 대체해버리고, 독자는 이를 다 읽고 폴리네시아 생태학이나 중세 교역 네트워크를 이해했다고 믿어 버립니다. 이는 지도와 영토를 혼동하는 꼴이죠.

AI가 이 역학을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어디에서 문제가 생기는지를 밝혀주었습니다. 꽃가루 분석법을 읽어본 적도 없고, 이스터 섬을 가본 적도 없고, 콰콰카와쿠 족에게 아무 관심도 없는 언어모델은 학술적 교양서 수준의 깊이가 있는 듯한 글을 생성했습니다. 이는 결코 AI가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교양서 파이프라인이 이미 글쓰기를 빈칸채우기로 압축시켰기 때문이죠. 인간 슬롭을 찍어내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한낱 공식으로 줄여 기계적인 프로세스로 전락시켰습니다. 아주 기계적이어서 기계가 알아서 생성할 수 있었죠. 이는 인공지능에 관한 평이 아닙니다. 이 정도면 된다고 판단하는 출판업계의 수준에 관한 평입니다.


《협력한다는 착각》 및 이에 관한 분석을 포함한 이 글의 일부는 AI를 사용해 만들어졌습니다. 샘플 도서가 진짜 학문처럼, 혹은 분석이 진짜 매체 비평처럼 느껴졌다면, 그 불편함을 잠시, 깊게 음미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같이 보기(현실의 인간 슬롭)

저자는 실제 사례를 목록으로 포함하고 싶었으나, 편집부는 불필요한 법적 분쟁을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해당 목록을 삭제하였습니다.

🖘 Go Back to Shitpost